덕수궁(德壽宮)의 아름다움
역사가 살아 숨쉬고 있는 고궁에서
모처럼 여유로운 시간을 가지고
문화유산의 고색창연한 아름다운 모습들을
카메라에 담아봤다.
유서깊은 고궁의 문화재를 감상하면서
생각이 역사속에 깊이 잠겨 보기도 한다.
2007.09.23.
대한문 (大漢門)
서울특별시 중구(中區) 정동(貞洞) 소재 덕수궁의 정문인 조선 말기의 목조건물.
정전(正殿)인 중화전(中和殿)을 짓기 전에는 임시로 즉조당(卽祚堂)을 정전으로 사용하고,
정문으로는 3문(三門) 형식을 갖추지 않은 인화문(仁化門)을 사용하였다.
1902년 궁궐을 크게 중건하면서 정전인 중화전과 중화문,
그리고 외삼문(外三門)인 조원문(朝元門)을 세워 법전(法殿)의 체제를 갖추고,
인화문 자리에는 건극문(建極門)을 세웠으며,
조원문 앞 동쪽에 대한문의 전신인 대안문(大安門)을 세워 정문으로 삼았다.
1904년 화재로 거의 모든 건물이 불타버리자 1906년에 중건하였고, 그
해 4월 대안문을 수리하여 이름을 대한문(大漢門)으로 고쳤다.
중화문(中和門)
중화문은 궁궐의 중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 팔작집인데,
건축 양식은 중화전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원래의 중화전은 중층정전이었으며,
그때의 중화문은 현재의 문보다 규모가 더 웅대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1904년 전전각이 소실될 때 이 문도 소실되었고,
중화전이 중건될 당시 재건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중화전과 같이 평면 규모에 비해 기둥 높이가 훤칠하여
다른 궁궐 전문(殿門)에서 볼 수 없는 비례감을 보여주는 문이라 할 수 있다.
좌우로 복도건물(행각)이 있었으나 지금은 문 동쪽에 일부 흔적만 남아 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궁궐 건축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중화전(中和殿)
덕수궁의 중심 건물로 임금님이 하례(賀禮)를 받거나
국가 행사를 거행하던 곳이고 중화문은 중화전의 정문이다.
광무 6년(1902)에 지었으나 1904년 불에 타 버려
지금 있는 건물은 1906년에 다시 지은 것들이다.
중화전의 규모는 앞면 5칸·옆면 4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밖으로 뻗쳐 나온 공포 부재의 형태가 가늘고 약해 보이며
곡선이 큰데 이것은 조선 후기 수법의 특징을 보이는 것이다.
안쪽에는 임금님이 앉는 자리를 더욱 위엄있게 꾸미기 위해
화려한 닫집을 달아 놓았다.
덕홍전(德弘殿)
덕홍전은 고종황제가 귀빈을 접견하던 곳이다.
원래 명성황후의 빈전인 ”경효전“이 있던 자리에 1911년에
다시 지은 것으로 덕수궁에서 가장 나중에 지은 건물이다.
기단은 기단을 3단으로 쌓은 세벌대에 앞 쪽에는 1단 낮은 계단을 덧붙였다.
기둥머리에 새 날개 모양의 익공을 두개 설치한 이익공의 간략한 구조이다
함녕전(咸寧殿)
보물 제 820호로 지정된 함녕전은 1897년 건축하여
고종황제가 거처하던 건물로,
1904년 화재로 인해 소실된 것을 같은해에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 고 있다.
고종황제는 1919년 1월 21일 이 함녕전에서 돌아가셨다.
석어당(昔 御 堂)
임진왜란후 피난갔던 선조가 돌아와
임시로 머문 곳이 덕수궁이다.
이후 역대 왕들은 이 석어당을 세우고
임진왜란 당시의 어려웠던 일을 회상하며
선조를 추모하였다.
이곳은 한때 인목대비가 유폐되었던 곳이며,
인조반정후 폐위된 광해군을 이 건물 앞뜰에 끓어 앉히고
죄를 문책하기도 하였다
석어당은 덕수궁내의 단청이 되지 않은 유일한 2층목조건물이다.
현재의 건물은 1904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같은 해 .다시 지은 것이다
즉조당 (卽祚堂)
좌측 건물은 선조가 임진왜란이 수습된 뒤에 돌아와
시어소(時御所)로 사용하였던 건물로서
1623년(인조 즉위년) 반정(反正)으로 인조가 즉위한 뒤에 즉조당이라 불렀다.
1897년 고종이 경운궁(현재의 덕수궁)으로 옮겨온 뒤 정전(正殿)으로 사용되었고
한때 태극전(太極殿)·중화전(中和殿)등으로 바뀌기도 하였다.
1902년 정전인 중화전이 건립되고 다시 즉조당으로 불렸는데
화재로 소실되어 1904년 3월에 중건하였다.
고종이 상왕이 된 뒤 거처하던 궁궐로서 궁명(宮名)을
덕수궁으로 바꾼 뒤인 1907년부터 1911년까지는
후비인 엄비(嚴妃)가 이곳에 거처하였다.
우측 2층건물은 석어당이다
석조전옆의 건물은 준명당(浚明堂)이다
고종이 아관파천 이후 러시아 공관으로부터 경운궁으로 거처를 옮기기 위하여
많은 전각들을 새로 짓던 시기, 즉 1897년경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경운궁의 편전 성격을 띤 내전의 하나로 고종이 외국 사신을 접견하는 등 정사를 보살피던 곳인데,
현존 건물은 1904년 화재로 소실된 이후 즉조당과 함께 새로 건립된 것이다.
함녕전으로 침소를 옮기기 전까지는 고종의 침소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1916년 덕혜옹주의 교육을 위하여 유치원을 이곳에 개설하기도 하였다.
대청에는 우물마루를 깔았고 완자살교창을 달았다.
석조전 (동관)
이 건물은 1900년 착공하여 1910년 완공된 지상 3층
연건평 1,247평의 석조 건물이다.
외관은 19세기 초 서구에서 유행하던 신고전주의적 양식으로
영국인 기사 하딩에 의에 설계되었고
공사초기에는 한국인 심의석, 러시아인 사바틴,
일본인 오가와 등이 감독하였으며,
후반에는 영국인 데이비슨이 감독하였다.
1900년(광무 4)에 착공하여 1910년(융희 3)에 완공되었다.
3층 석조건물로 정면 54.2m, 측면 31m이며,
1층은 거실, 2층은 접견실 및 홀,
3층은 황제와 황후의 침실·거실·욕실 등으로 사용되었다.
앞면과 옆면에 현관을 만들었다. 기둥 윗부분은 이오니아식,
실내는 로코코풍으로 장식한 서양식 건축기법이 특이하다.
덕수궁미술관(석조전 서관)
1937년 이왕직박물관으로 지은 별관은 연면적이 1,104평이며,
해방 뒤 석조전의 부속 건물로 사용되었다.
현재는 덕수궁 현대미술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덕수궁(德壽宮)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선조가 의주까지 피난갔다가
서울로 돌아와 보니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이 모두 불타버려서
왕이 거처할 왕궁이 없어서 왕족의 집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완전했던 월산대군가를 행궁으로 삼아 왕이 거처하게 되었다.
1608년 2월에 선조는 행궁의 침전에서 돌아가시고
광해군이 행궁의 서청에서 왕위에 즉위하였다.
광해군 3년(1611)에 행궁을 경운궁 이라 하였다.
경운궁의 정문은 원래 정남쪽의 인화문이었으나,
다시 지으면서 동쪽에 있던 대안문을 수리하고
이름도 대한문(大漢門)으로 고쳐 정문으로 삼았다.
1906년에는 화재로 불탔던 중화전이 복구되었다.
석조전은 1900년에 착공하여 1909년에 완공되었다.
1907년 7월 20일에 일본침략자들의 강압에 의하여
고종이 순종에게 제위를 전위 하자
선제가 거처하는 궁이 되어 덕수궁이라 하였다.
-덕수궁(http://www.deoksugung.go.kr/)-
대중교통안내
지하철 1호선 (2번 출구), 2호선 (12번 출구) 덕수궁 방면
버스 : 시청 앞 하차
2007.09.23.
Anso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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